끝자락에서 다시 시작

끝자락에서 다시 시작: 광야의 처음을 기억하며 남은 날을 걷는 법 은혜 회복 실천 묵상 인생의 끝에서 묻습니다, 광야의 처음 은 무엇을 남겼나요? 끝자락에 서 보니, 시작은 의외로 광야 였어요. 길이 막막했는데요, 그 황량한 자리에서 하나님 한 분 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뿌린 눈물과 기도가 오늘의 나를 지탱해 주고 있더라고요. 1. 왜 다시 ‘처음’을 돌아보나요?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크게 기억하지만, 삶을 바꾼 순간은 대개 길이 안 보이던 때 였습니다. 한밤의 작은 위로, 뜻밖의 손길, 새벽의 한 줄 말씀… 우연이 아니었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삼상 7:12) 에벤에셀의 고백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끝의 지혜는 화려한 피날레가 아니라 초심으로의 귀환 에서 태어나요. 광야 수업의 핵심은 의존 이었습니다. 내 힘보다 크신 분께 기대는 연습이었죠. 2. 남은 인생, 무엇을 붙들며 살까요? ① 감사 — 불평보다 먼저 드리는 고백이에요 만나가 익숙해지면 금세 불평이 나왔죠. 이젠 작아 보이는 공급에도 “충분합니다” 를 말해 보자고요. 감사는 마음의 각도를 살짝 틀어 줍니다. 아침: “오늘도 숨 쉬게 하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시작해요. 한 끼 앞에서: 함께 먹는 은혜를 짧게 감사해요. 잠들기 전: 하루의 작은 기적 1가지를 기록합니다. ② 순종 — 완벽한 계획보다 오늘 한 걸음입니다 구름기둥이 멈추면 멈추고, 움직이면 따라갔습니다. 순종은 복잡한 전략이 아니라 지금 가능한 선한 선택 이죠. 완벽하지 않아도, 오늘 할 수 있는 착한 일 하나에 발을 내딛어요. ③ 사명 — 나이와 상관없이 갱신됩니다 끝자락이라고 사명이 끝난 건 아니에요. 경험·눈물·축적된 기도 는 다음 세대를 살리는 자산입니다. 나눔과 위로, 중보로 흘려보내면 사명은 더 깊어질 거예요....

기다려주는 마음, 그 깊은 품격

 

기다려주는 마음, 그 깊은 품격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 사람이 회복될 시간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배려를 받기도 하고, 또 배려하려 애쓰기도 해요. 그런데 진짜 배려는,
속도가 아니라 마음을 읽는 기다림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다윗의 따뜻한 조문,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모욕

이스라엘 왕 다윗은 예전에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었던 암몬 사람들의 왕 나하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그는 그 은혜를 마음에 품고, 고인을 애도하며 조문 사절단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라, 진심 어린 인간적인 표현이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눈 왕과 그의 신하들은 이 방문의 진의를 의심했는데요. “이스라엘 왕이 사람을 보낸 건 애도하려는 게 아니라, 정탐하려는 계략일지도 몰라!”라며 불신과 오해 속에 다윗의 사람들을 모욕하고 말았습니다.

■ 상상 이상의 모욕, 수염을 자르고 옷을 찢다

결국 그들은 다윗의 신하들의 수염을 절반이나 깎아버리고요, 의복을 엉덩이까지 잘라내어 공개적인 수치심을 안긴 채 돌려보냈어요. 당시 수염은 남자의 명예를 상징했고, 옷을 그렇게 자른다는 건 인격을 짓밟는 행위나 마찬가지였죠.

돌아오는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 모욕은 단순한 창피함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흔드는 아픔이었을 거예요.

■ 다윗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보통이라면 분노가 먼저 앞섰겠죠. 당장 복수하거나 군사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감정보다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살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수염이 다시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렀다가 돌아오게 하라." 그 말에는 단호함도 있었지만, 동시에 상처 입은 자존심을 품어주는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었어요.

사람들은 복수를 기대했지만, 다윗은 기다림을 선택했습니다. 누군가가 모욕을 당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이 회복될 시간을 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다윗은 그 깊은 이해심으로 참된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어려운 상처를 갖고 살고 있어요. 수염처럼, 마음도 다시 자라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괜찮지?”, “왜 아직도 그거 가지고 힘들어해?”라고 말하곤 하죠.

진짜 위로는 조언이 아니라 기다림입니다. 말 대신 침묵으로 곁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진한 배려 아닐까요?

■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기다리셨어요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분이라고요. 우리를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돌아올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죠. 그 기다림에는 사랑이, 극률이, 인내가 담겨 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배려는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엄을 다시 일으킬 기회를 주는 회복의 기다림이었죠.

■ 우리도 누군가의 여리고가 되어야 해요

혹시 지금 누군가가 상처받은 채 조용히 숨고 싶어하지 않나요? 세상 앞에 다시 서기엔 너무 아프고 부끄러워서 회복의 장소를 찾고 있다면, 우리가 그 여리고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려주는 일은 느리고 답답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기다림은 결국 그 사람을 살리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마음이 자라나길 기다려주는, 진짜 배려를 아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 기다림을 통해 마음을 품는 사람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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